미국 여성들의 교제 범죄 피해 다큐를 쭉 봤는데
북미 특유의 연애 문화가 이런 범죄에 아주 큰 바탕이 된다는 걸 느꼈음
그 특유의 문화란 바로 짝짓기(pairing up)의 전시성임
미국에서는 성적인/로맨틱한 짝을 찾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관전용 스포츠로 여겨짐. 이건 어느 문화권에나 어느 정도 있는 현상이지만 미국은 그 정도가 너무, 너무 심함. 모든 사람이 한번씩 돌아가면서 과시한 연애를 나도 과시할 차례가 됐다는 압박감이 너무 강함. 전국민이 자기 인생의 단 한 사람(the one)을 찾아야 된다는 사회적 조건화가 너무 강력함. 흡사 모든 사람이 디즈니 영화의 주인공인데 모두가 자기 영화를 보려고 앉아 있으니 모두가 기대하는 결말=짝짓기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음
만약 남들은 다 짝을 지은 나이가 됐는데 자기한테 짝이 없다? 이건 그 사람들한테는 비유하자면 여러 사람이 빙 둘러 앉아서 마이크를 돌려가면서 과시하는 모임이 있는데 자기 차례로 마이크가 넘어왔는데 과시할 게 하나도 없어서 정적만 흐르는 상황처럼 느껴지는 거임
이런 상황이니 연인이나 배우자를 만들 때 진짜 온전히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관계를 시작하기 보다 무조건 관계를 시작하려고 상대를 다급히 찾아 헤매다가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만나는 형태가 돼버리기 일쑤임. (물론 이런 경우에도 대외적으로는 평생에 하나뿐인 소울메이트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러니 신중을 기하기가 어려워짐. 그리고 사귀기 시작한 후 그 사람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신호가 보여도 쉽게 관계를 끝낼 수가 없어짐. 왜냐하면 관계를 끝내면 자기는 다음 연인을 구하기 전까지는 싱글이 될 텐데 그건 루저의 슬픈 인생처럼 보이거든
그리고 로맨스 만능주의의 영향도 큼
북미에는 이 세상 모든 인간관계 중 가장 깊은 궁극의 관계는 로맨틱한 관계고, 인생 모든 것을 맡기는 상대는 반드시 로맨틱한 파트너여야 하며, 로맨틱한 파트너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있어 갖는 모든 요구를 전부 만족시켜주는 단 하나의 절대반지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 아주 강함. 이렇게 로맨틱한 파트너에게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의미가 너무너무 크고 그게 없으면 아예 인생이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다 보니, 연인과는 사귀자마자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생활, 재정, 안전 전반을 공유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짐. 다른 어떤 관계의 사람과도 만난지 몇 달만에 저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겠지만 로맨틱한 파트너와는 저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짐. 만난지 몇 달 밖에 안 된 사람한테 인생 모든 걸 맡겨 버리면 당연히 범죄 피해를 당할 확률이 올라가지 않겠어?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고, 저런 삶에 동의하지 않는 여성은 가장 긍정적으로 봐도 과거에 무슨 범죄 피해를 당해서 유별난 불안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취급 받거나 나쁘게는 아예 정신 나간 취급을 받기 일쑤임
저렇게 타인에게 자신의 취약성을 낱낱이 드러내는 관계가 의무가 돼버린 세상에서 그와 관련한 범죄가 자꾸 발생하는 건 너무나 예상된 결과임. 생각해봐. 직장에서 학대를 당하면서도 계속 다니는 사람의 얘기는 너무 흔해서 들어도 놀랍지도 않을 정도임. 왜냐? 직장은 먹고 살려면 반드시 다녀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곳임. 그런 절박성이 있으니까 직장에서도 노동자를 학대 하는 거고 그러니까 노동자도 못 그만두고 다니는 거임. 그게 의무적으로 절박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의 본질임. 그런데 의무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연애를, 심지어 근로보다 더하게 자신의 취약성을 노출할 수 밖에 없는 그 관계를, 마치 근로처럼 생존을 위해 잠시도 쉬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갈아탈 상대가 없을 때는 절대 그만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저렇게 의무화 한다면 그 안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범죄가 벌어지겠냐고. 이건 그냥 불보듯 뻔한 결과잖아? 그런데도 그게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지 않다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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